왜 유리 업계는 하나가 되지 못하는가! 경쟁은 치열하지만 협력은 부족하다

국내 유리산업은 지난 수십 년간 건설산업 성장과 함께 발전을 거듭해 왔다. 초창기 단순 판유리 가공 중심에서 벗어나 현재는 강화유리, 복층유리, 접합유리, 방화유리, 스마트글라스, BIPV용 유리 등 고기능성 제품 생산까지 영역을 확대하며 기술 수준도 크게 향상됐다.
그러나 산업 규모와 기술력 성장에도 불구하고 업계 안팎에서는 여전히 같은 지적이 반복된다.

“유리 업계는 협력이 안 된다”
실제로 업계 행사나 세미나, 전시회 현장에서는 산업 발전과 시장 확대의 필요성을 공감하면서도 정작 공동 대응이나 협력 프로젝트는 많지 않다. 건설 경기 침체와 원자재 가격 상승, 인력난, 탄소중립 규제 강화 등 공동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늘어나고 있음에도 업계의 집단적 대응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 것일까.
본지는 국내 유리산업의 구조적 특성과 시장 환경을 중심으로 협력이 어려운 원인을 진단하고 향후 발전 방향을 모색해 보았다.

경쟁자는 많고 시장은 좁다
국내 유리산업의 가장 큰 특징은 공급 과잉에 가까운 경쟁 구조다.
판유리 제조사를 제외하고도 전국에는 수백 개의 강화유리, 복층유리, 접합유리 가공업체가 운영되고 있다. 업체 수는 꾸준히 증가했지만 시장 규모는 건설경기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건설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유리 수요증가세도 둔화되고 있다.
업체들은 한정된 시장 안에서 동일한 프로젝트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예전에는 시장이 성장하면서 모두가 먹고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물량 자체가 줄어들어 경쟁이 훨씬 치열해졌다”고 입을 모은다.
결국 업체들은 협력보다 생존을 우선하게 되고, 산업 전체의 이익보다 당장의 수주 확보에 집중하게 된다.

가격 경쟁이 만든 악순환
유리 제품은 일정 수준 이상 표준화된 산업재다.
KS 규격과 건축 기준을 충족해야 하며 소비자가 품질 차이를 직관적으로 인식하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품질보다 가격이 주요 경쟁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건설 현장에서는 최저가 입찰 방식이 여전히 강하게 작동한다. 일부 프로젝트에서는 유리 성능과 품질보다 납품 가격이 우선 고려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가격 경쟁이 산업 전체의 수익성을 악화시킨다는 점이다.
수익성이 낮아지면 설비 투자와 연구개발이 줄어들고 결국 차별화 기술 개발도 어려워진다. 다시 가격 경쟁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한 업계 대표는 “유리업계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모전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말했다.

신뢰를 잃어버린 산업
협력은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국내 유리업계는 오랜 기간 경쟁 중심으로 성장해 왔다.
거래처 이동, 인력 스카우트, 가격 정보 노출, 생산 기술 유출 등의 경험은 업체 간 경계심을 키웠다.
실제로 일부 업체들은 기술 세미나나 업계 모임에서도 핵심 생산 기술이나 원가 구조를 공개하는 것을 꺼린다.
어느 중견 가공업체 대표는 “업계 사람들은 친하지만 회사 간에는 서로 경계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결국 협력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산인 신뢰가 충분히 형성되지 못하면서 공동 연구나 공동 투자 역시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 중심 산업의 한계
국내 유리 가공업체 대부분은 중소기업이다. 생산, 품질관리, 영업, 납기 대응만으로도 인력과 자원이 부족하다.
유럽이나 일본처럼 전문 연구소를 운영하거나 산업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할 여력이 있는 기업은 많지 않다.
실제로 상당수 업체들은 당장의 생산성과 매출 관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산업 구조에서는 공동 연구개발, 공동 마케팅, 해외시장 개척 같은 중장기 프로젝트가 추진되기 어렵다.

산업이 발전하기 위한 공동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업계에서는 협회와 단체의 역할에 대한 논의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업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공동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사)한국판유리창호협회를 비롯한 산학연을 연결하는 협단체 및 여러 모임도 있으나, 회원사 참여율과 공동 사업 추진력은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특히 업계 공통 현안인 에너지 정책, 화재 안전 기준, 탄소중립 대응, 인력 양성 등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공동 대응 체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 업계 관계자는 “산업 전체를 움직이는 플랫폼의 역할과 적극적인 공동 참여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제는 협력하지 않으면 생존도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과거 어느 때보다 협력이 필요한 시기다.
정부는 탄소중립 정책을 강화하고 있으며 건축물 에너지 기준도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고성능 로이유리, 진공유리, 스마트글라스, BIPV 등 새로운 시장이 확대되고 있지만 개별 기업이 독자적으로 대응하기에는 투자 부담이 크다.

인력 부족 문제도 심각하다.
생산 현장의 평균 연령은 높아지고 있지만 젊은 인력 유입은 감소하고 있다. 업계 전체가 공동으로 인력 양성 체계를 구축하지 않는다면 기술 전승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또한 중국 업체들의 기술력 향상과 가격 경쟁력 강화는 국내 업체들에게 새로운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과거 국내 업체들이 서로 경쟁했다면 앞으로는 글로벌 경쟁자들과 싸워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해외는 어떻게 하고 있나
독일과 일본의 유리산업은 경쟁과 협력을 구분한다.
기업들은 시장에서는 치열하게 경쟁하지만 산업 발전을 위한 기술 표준, 인력 양성, 연구개발, 해외시장 확대 분야에서는 적극적으로 협력한다.
독일의 경우 제조사, 가공업체, 설비업체, 연구기관이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례가 많다.
일본 역시 업계 단체를 중심으로 안전 기준 강화와 품질 향상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산업 전체의 경쟁력이 곧 개별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의 미래는 신뢰에서 시작된다. 유리산업은 지금 중대한 변곡점에 서 있다.
건설 경기 침체와 시장 포화, 인력난, 탄소중립, 글로벌 경쟁 심화 등 수많은 과제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개별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이제 업계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떻게 경쟁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성장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협력은 경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높여 더 큰 시장을 만들고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국내 유리산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기술보다 먼저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대한민국 유리산업의 미래 경쟁력은 결국 개별 기업의 생산라인이 아니라 업계 전체가 얼마나 함께 움직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함께 가지 않으면 멀리 갈 수 없다”                                                                                    -유리창호저널 최영순 대표/기자